법정 공시 아닌 거래소 공시는 구조적으로 ‘약한 공시’
스코프3 3년 유예, 국제 기준·투자자 요구와 엇박자
공시 대상은 자산 30조 원 이상(58개 사) 아닌 2조 원 이상 기업(242개 사)이 합리적
정교한 설계 갖춘 공시 인프라 필요
금융위원회가 2월 25일 ‘제4차 생산적금융 대전환 회의’를 통해 ESG 공시기준 최종안을 확정하고, ESG 공시제도 로드맵(안)을 공개했다. 해당 로드맵은 현재 의견수렴 단계에 있다. 금융위는 2026년 3월까지 추가 공개 의견수렴을 거친 뒤 4월 중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 나온 방향을 보면 실제로 지속가능성 공시가 작동할 제도 ‘설계’가 빠져 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기준과의 정합성과 이해관계자 수요를 반영하겠다던 금융위의 방향은 이번 방안에서 후퇴했다.
먼저 지속가능성 공시는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전반에 관한 정보를 투자자와 이해관계자에게 공개하는 제도다. 이 가운데 기후공시는 온실가스 배출량, 기후위기 노출 수준, 공급망 전환 리스크 등 기업의 기후 관련 재무적 영향을 다루는 핵심 축이다. 소비자가 제품 성분표를 보고 구매를 결정하듯, 투자자들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자본 배분을 결정한다. 정보가 없거나 투명하지 않다면 자본시장의 신뢰도는 높아질 수 없다.
거래소 공시는 구조적으로 ‘약한 공시’다
문제는 도입 방식이다. 금융위는 우선 일정 기간 '거래소 공시'로 운영한 뒤 법정 공시 전환 여부와 시기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전환 시점은 추후 의견수렴을 거쳐 확정할 계획이다. 그러나 지속가능성 정보 공시는 거래소 공시로 시작할 사안이 아니다. 거래소 공시는 구조적으로 ‘약한 공시’다.
거래소 공시는 한국거래소와 상장회사 간 계약 관계에 근거한 공시다. 허위·부실 공시에 대해 금융당국이 직접 과징금이나 형사책임을 묻는 구조가 아니다. 대법원은 2007년 판결(대법원 2007. 11. 15. 선고 2007다1753)에서 한국증권선물거래소의 상장규정은 법규명령이 아니라 사인 간 계약의 성질을 갖는 자치 규정, 즉 약관에 해당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가령 거래소 공시 방식 중 하나인 조회공시는 기업의 답변에 크게 의존한다. ‘진행 중인 사항 없음’, ‘미확정’과 같은 형식적 답변이 반복되며, 이후 번복되거나 지연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또한 거래소 공시 규정 위반 시 대표적 제재인 ‘불성실공시법인 지정’은 벌점 10점 이상을 부과받은 기업에 한하여 1일간 매매거래정지에 그친다.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사실은 1년간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공표되지만, 이는 명예적 제재에 가깝다. 즉, 허위·부실 공시에 대한 법적·경제적 책임은 낮은 수준이다.
거래소 공시로는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을 막기 어렵다. 지속가능성 공시는 단기 실적이 아니라 기후·환경·공급망 리스크라는 장기적·구조적 위험을 다루는 정보다. 이러한 체계로는 허위·과장 또는 선택적 공개, 그린워싱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어렵다. 법정 공시를 통해 명확한 책임과 제재 구조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공시의 실효성은 확보되기 어렵다.
스코프3 공시 3년 유예는 국제 정합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정이다
한편, 금융위는 스코프3(공급망 전반 배출량) 공시를 3년 유예하겠다고 밝혔다. 산정·추정 인프라 구축을 전제로 원칙적으로 2031년(FY2030)부터 공시를 시작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스코프3는 기업 전체 온실가스 배출의 평균 70~90%를 차지하는 핵심 영역으로, 이를 제외하면 기후 영향을 온전히 평가하기 어렵다. 400여 곳의 글로벌 기관투자자 그룹(IIGCC)도 스코프3 데이터 없이는 투자의 기후리스크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3년 유예’는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을 유지하겠다는 취지와도 어긋난다. 일본은 2025년 3월 ISSB 기준에 부합하는 공시기준을 확정하며, 스코프3 유예를 1년으로 설정했다. 호주 역시 법정 공시 체계에서 스코프3를 포함하되, 유예 기간을 1년으로 설정했다.
이들 국가는 ‘처음은 느슨하게 나중에 강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법적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3년 유예는 국내 기업에 준비 시간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투자자에게 ‘한국 기업의 지속가능성 공시 정보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신호를 줄 위험이 크다.
공시 대상은 ‘자산 2조 원’ 이상이 합리적이다
지속가능성 공시 대상 기업 선정기준으로 연결자산총액 기준 3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기업(58개 사)을 적용한 것은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이다. 공시 대상은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242개 사)을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은 이미 상법·자본시장법상 대규모 상장회사로서 강화된 지배구조 규제를 받고 있다. 공시 역량 역시 충분하다. 한국거래소 조사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자율 공시 비율은 약 67%에 이른다. 국내외 고객사는 이미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의 중소·중견 협력업체에까지 지속가능성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공시 대상 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중소·중견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후공시 역량 강화를 막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뒤처지게 만들 수 있다.
특히 고탄소 산업일수록 공시를 미룰 이유가 없다. 유럽연합(EU)는 2026년 1월부터 고탄소 산업 제품에 대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적용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제도는 EU를 넘어 영국 등 여러 국가에서 이미 도입되었거나 적극 검토되고 있다. 이같은 기후 무역 체제의 확장은 수출 중심의 한국 제조업에 직격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는 탄소 배출 정보를 산정하고 공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최소한의 요건이다.
정교한 설계 갖춘 지속가능성 공시 인프라가 필요하다
지속가능성 공시의 출발점은 58개 사에 그치는 거래소 공시가 아닌,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스코프3 의무 공시를 포함한 법정 공시여야 한다. 법정 공시를 통해 책임과 제재 구조를 명확히 하고, 법에 단계별 로드맵을 명시해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한편, 성실하게 공시한 기업을 보호하는 면책(Safe Harbor) 조항도 함께 도입해야 한다.
글로벌 자산운용사들도 수년째 한국의 공시 의무화를 촉구해 왔다. 올해 2월 약 90조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국제기업거버넌스네트워크(ICGN)는 지속가능성 공시는 거래소 규정이 아니라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법적 근거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금융위의 로드맵(안)은 법정 공시 체계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시장 혼란을 줄이고, 한국 기업이 기후·공급망 규제 강화 국면에서 글로벌 자본시장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최소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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